[김씨표류기] 민방위 훈련 날 짜장면 한 그릇 하시죠..?

이 포스터를 메인으로 했어야 했어....


봄소식보다 더 일찍 찾아오는 교육 훈련소집 통지서

 

겨울도 힘을 잃어가는 3월 초순이 되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통장님의 전화가 이제는 반갑다. 

인구 수천만명이 사는 도시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통장 시스템이라니.. 놀랍다.

그냥 대충 던져 놓으시라고 해도 이것만은 꼭 직접 전달해야 한다며 약속시간을 잡는다. 


삭막한 요즘.. 통장님과의 접촉은 매우 신박하기까지 하다. 

잠시 잊고 있던 버스와 지하철의 종이티켓과 같은 통장님! 

그날 밤, 내 소속이 충현동 015통 민방위대 4년 차 임을 확인하고 


'아... 이제 끝나가네 진짜'라는 감회에 젖었다. 


이걸 4년간... 뒷모습만 봐도 이미 지쳤다 


민방위? 민방위 훈련? 


내일은 민방위대원 소집과는 다른 민방위 훈련의 날이고 전국적으로 화재대비 훈련을 실시한다고 한다.

오후 2시면 사이렌이 울리고 롯데월드의 놀이기구도, 길 위의 버스도, 라디오의 DJ도 '일시정지' 상태로 들어간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연인이나 버스 안에서 초조하게 휴대폰 시계를 보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시간이겠지만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어릴 때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는 매우 인상 깊었고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전국에 이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니 너무 신기하다!' 


두 도시 외계인(外界人)의 이야기


김씨표류기의 주인공 김씨는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만 민방위 훈련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머물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또 다른 여자 주인공 김씨는 사이렌 소리만 학수고대하는 히키코모리 중 한 명이다.

그녀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녀가 유'이'하게 창을 활짝열고 밖을 보는 일은 달 사진을 찍을때와 민방위 훈련으로 세상이 멈춘 시간 뿐이다.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민방위 훈련 날, 방안의 김씨는 외계인(또다른 김씨)의 신호를 감지한다.

(그 둘을 이어주는 SONY a 시리즈+망원렌즈...ㅋ) 


"Hello"


영화 마션의 맷 데이먼 정도는 애교로 봐줄 정도의 위기 해결 능력을 몸으로 습득하는 김씨를 보고 있자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호기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는 걸 글로 읽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팩트 폭행을 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김씨의 고군분투기를 관찰하는 또 다른 김씨는, 퍼스트 컨텍트를 위해 야간 외출이라는

엄청난 일탈을 하기 시작하고 미묘한 기류의 은밀한 소통이 시작된다. 


영화는 소재의 참신함도 중요하지만 그 참신함이 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감독, 연출과 작가의 능력이고 중요한 관찰 포인트이다. 


김씨표류기에서는 짜장면을 향한 욕구와 각각의 재료의 획득, 최종적인 시식을 하나의 퀘스트로 만들어

유구한 인류사의 근본을 압축적으로 표현 한다던지 히키코모리의 이상적인 세상나들이 성공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작가 이완의 '메이드 인' 


짜장면이 중요한데... 얼마나 위대한 일 인지 비유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있어 보이기 위해, 뜬금없지만 현대미술작가 한명 정도는 소개를 해야할 것 같다. 


이완 작가의 '메이드 인' 시리즈는 하나의 상품을 만들어지는 전 과정에 참여한 작가의 노동 현장을 찍은 영상 시리즈 물 이다. 

대만에선 설탕 한 줌을 얻기 위해 사탕수수 밭에서 수확을 하고.. 


그렇게 한 줌의 설탕을 얻어낸다. 


이게 별 거 아닌 흔한 내용이고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보다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여하튼, 김씨 표류기의 짜장면은 위대하다. 

말 그대로 예술작품이다.

올드보이의 '낙지' 와 견줄 수 있는 먹방 씬이라 확신한다.  




춘계 사업 


친구들이나 주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농사지어요. 농부랑 똑같은 라이프 스타일로 삽니다. 봄에 바쁘고, 봄에 놀면 가을에 망하고.." 


역시나 올해도 봄은 한창이다. 


장화나 작업화가 더 편하고 대~충 차려입은 옷으로 출근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날의 연속이다. 

구내식당은 전국각지로 출장이 많아서 의무식권을 겨우 겨우 다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저렇게 봄 사업을 하다 보면 귀갓길에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뭘 만들려고 이렇게 바쁠까?' 


결론 없이 끝나는 생각의 꼬리지만 결론은 항상 비슷하다. 


'뭐 하나 첨부터 끝까지 하는 게 참 어렵네.'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물을 준 뒤 기다리는 시간의 아름다움과 고생


다시 돌아와 민방위 


민방위 교육과 훈련은 교육 훈련소집 통지서를 가져다주시는 '통장님'이라는 직책만큼이나 퇴색되었다. 


존재의 사실도 알고 있고 엄연히 공존하고 있으나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중요성은 애당초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민방위 교육과 훈련은 소중한 존재 이기도 한데... 

교육은 4시간이지만 공가로 하루를 쓸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아닌 사업장의 직원분들께는 심심한 위로를..).



황홀한 시간이 아닐 수 있겠는가! 


두 도시 외계인(外界人)은 접촉을 할 수 있을까?


벚꽃을 맞이하며, 

1/4분기를 마무리하며 김씨표류기를.. 


영화 속 자신의 방에 스스로 갇혀 지내던 김씨가 그렇게 기다리던 민방위 훈련일이 내일이다.

현실 속 나는 당연히 그 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마음껏 연구실 포지를 돌아다니며 일을 할 예정이다.

아주 작은 일탈을 하는 듯한 쾌감도 조금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바쁠지도 모르고. 


하지만 뭘 위해서 움직이는지는 생각을 해 보려고 한다.


오늘은 내일의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하는지. 

내일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일이 민방위 훈련이라는 말에.. 

두 김씨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고,

봄이 오는구나 싶다. 


그리고 가장 당이 떨어지는 봄날 하루는

민방위 교육을 볼모로 삼아 공가를 쓰고

 꽃놀이를 가야겠다.


영화의 영상미도 좋다



덧, 영화에 나오는 진짜루라는 중국집은 진짜로 합정역 근처에 있다. 

그리고 홍대, 합정, 상수에서 좀 놀았다면 24시간 운영을 하기에 한번은 먹어봤을 나름 뼈대있는? 식당이다. 

지금은 근처로 이전 한 것으로 알고있다.